[산업일보]
인공지능(AI) 산업의 폭발적 성장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데이터센터를 단순한 전력 소비 시설이 아닌 전력망 안정을 돕는 ‘유연성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전략이 제시됐다.
신정훈 한국전력공사 전력연구원 차장은 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6 한국발전산업 컨퍼런스’에서 수도권 전력 계통 포화의 해법으로 데이터센터의 무정전 전원장치(UPS)를 활용한 ‘그리드 인터랙티브(Grid-Interactive)’ 기술과 폐지 석탄화력발전소 부지를 활용한 ‘서해안 에너지 특화 벨트’ 구축을 제안했다.
“수도권 쏠림 심각… 신청 195건 중 2퍼센트만 통과”
신 차장은 먼저 국내 데이터센터의 수도권 집중 현황과 전력 공급의 현실적 한계를 짚었다.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2029년까지 국내 데이터센터는 총 732개, 전력 사용량은 49기가와트(GW)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데이터센터의 80% 이상이 수도권에 집중되면서 전력 공급은 한계에 다다랐다. 신 차장은 “지난해 8월부터 올해 6월까지 접수된 수도권 데이터센터 계통 영향평가 신청 건수가 195건(20GW 규모)에 달했으나, 이 중 통과된 건수는 단 4건으로 승인율이 2% 수준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는 “수도권 집중으로 인해 전력 계통과 수급에 막대한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며 “단순히 전력을 공급하는 방식으로는 해결이 어렵다. 데이터센터 자체가 계통 안정화에 기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UPS를 발전소처럼… ‘그리드 인터랙티브’ 기술 주목
이를 위해 그가 제시한 방안은 데이터센터 내 필수 설비인 UPS와 비상발전기를 전력망 유연 자원으로 활용하는 ‘그리드 인터랙티브 데이터센터’ 운영이다.
통상 데이터센터는 정전에 대비해 부하량보다 넉넉한 용량의 UPS를 상시 가동한다. 신 차장은 “데이터센터의 온라인 UPS와 에너지저장장치(ESS) 기능을 통합해, 평상시에는 전력을 공급받다가 전력망 주파수가 불안정해지면 즉시 자체 배터리로 전력을 공급하는 ‘고속 주파수 응답(FFR)’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한전 전력연구원의 시뮬레이션 결과, 대규모 발전기 탈락 사고 발생 시 데이터센터의 UPS가 즉각적으로 반응해 전력망의 주파수 하락을 막고 계통 안정도를 높이는 효과가 확인됐다. 신 차장은 “데이터센터가 단순한 부하(Load)가 아니라 비상시 5분에서 10분간 전력을 자체 충당하거나 역송할 수 있는 발전 자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폐지 석탄발전소, ‘AI 데이터센터 허브’로 재탄생
전력망 포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입지 전략으로 ‘서해안 에너지 특화 벨트’와 ‘동해안 친환경 쿨링 벨트’ 구상도 공개됐다.
신 차장은 “2036년까지 폐지 예정인 보령, 태안 등 서해안 지역의 석탄화력발전소 28기 부지를 데이터센터 클러스터로 전환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해당 부지는 이미 송전 철탑과 변전소 등 전력 인프라가 완비돼 있고, 발전소 냉각수로 활용하던 해수 담수화 설비 등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어 데이터센터 입지로 최적이라는 분석이다.
신 차장은 “폐지되는 발전소 부지에 데이터센터를 유치하고 인근의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와 연계하면, 별도의 대규모 송전망 건설 없이도 최대 30기가와트까지 재생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다”며 “이는 지역 균형 발전과 데이터센터 전력난을 동시에 해결하는 ‘스마트 파워 빌리지(SPV)’ 모델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끝으로 신 차장은 “미국 텍사스주나 PJM(미국 동부 전력망) 등 해외에서는 이미 데이터센터의 자체 발전 의무화와 전력 유연성 제공을 제도화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분산에너지 특화지구’ 지정을 통해 데이터센터와 에너지 자원을 통합 관리하는 법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