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글로벌 수소 산업이 올해를 기점으로 거대한 구조적 전환을 맞이한다. 그동안 시장을 지배했던 장밋빛 비전이 걷히고, 수익성과 실현 가능성을 냉정하게 따지는 ‘옥석 가리기’가 본격화될 조짐이다. 유럽은 이상적인 친환경 기준을 현실적으로 낮추는 타협안을 택했고, 한국은 강력한 페널티와 인센티브를 동시에 가동하며 시장을 강제 견인하는 전략을 폈다.
우드맥킨지(Wood Mackenzie) 등 주요 분석에 따르면, 올해는 수소 시장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조정되는 분기점이다. 가장 큰 변화는 유럽의 태세 전환이다. 유럽연합(EU)은 그간 비생물학적 기원 재생에너지 연료(RFNBO) 규제를 고수해왔으나, 까다로운 요건이 생산 단가를 1~2달러가량 높이며 프로젝트 좌초를 유발하자 궤도를 수정했다.
지난해 11월 공표된 ‘저탄소 연료 위임법’이 기폭제다. 블루수소를 포함한 비(非)RFNBO 모델을 제도권으로 편입시키면서, 올해에만 연간 5만 톤 규모 이상의 대형 저탄소 수소 프로젝트 3건이 최종투자결정(FID)에 도달할 것으로 관측된다. 반면 2030년까지 산업용 수소의 42%를 RFNBO로 채우겠다는 목표는 사실상 후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수출 대박을 꿈꾸던 신흥국 시장에서는 ‘가격’과 ‘실행력’의 딜레마가 드러났다. 인도는 최근 연간 72만5천 톤 규모의 그린암모니아 공급 입찰 결과를 내놨다. 톤당 550~700달러라는 경쟁력 있는 가격이 형성됐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명암이 갈린다. 기존 인프라를 활용하는 브라운필드 사업자는 생존 가능성이 높지만, 대규모 신규 투자가 필요한 물량(약 28만5천 톤)은 계약 체결 전 철회될 위험이 크다. ‘세계의 수소 허브’를 자처했던 중동 역시 유럽과 동북아의 수입 정책 지연으로 인해 올해 최소 3개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가 취소되거나 축소될 위기에 놓였다.
글로벌 시장이 이처럼 속도 조절에 들어간 사이, 기술 시장에서는 ‘암모니아 크래커’가 현실적 대안으로 부상했다. 수입한 암모니아를 분해해 수소를 얻는 크래커 프로젝트는 북서유럽과 동북아에서 총 6억 달러 규모의 투자가 확정될 예정이다. 이는 재생에너지 수소보다 비용 부담이 낮아 철강, 정유 등 당장의 산업 수요를 메울 핵심 설비로 평가받는다.
한국 시장은 정부 주도의 ‘강공 드라이브’로 요약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올해 일반 수소 발전 시장(CHPS) 의무 구매량을 전년 대비 100% 늘린 2,600GWh로 확정하며 발전사들에게 확실한 수요 시그널을 보냈다.
모빌리티 분야는 징벌적 페널티를 도입해 보급 압력을 높인다. 올해부터 자동차 제조·수입사가 친환경차 판매 비율(28%)을 맞추지 못할 경우, 미달 차량 1대당 150만 원의 기여금을 물어야 한다. 정부는 이를 통해 수소 버스 1,800대를 포함, 총 7,820대의 수소차를 보급하고 충전소 500기를 구축해 초기 시장의 저항을 돌파하겠다는 구상이다.
기업 투자를 유인할 당근책도 병행된다. 수전해 및 탄소포집(CCUS) 기술이 국가전략기술로 지정되면서, 중소기업은 최대 25%(대기업 15%)의 시설 투자 세액 공제 혜택을 받게 된다. 올해는 글로벌 수소 산업이 단순한 ‘선언’의 시대를 끝내고, 구체적인 ‘실행’과 ‘비용’을 증명해야 하는 냉혹한 비즈니스의 장으로 진입했음을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