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NVIDIA)와 글로벌 AI 팩토리 구축 및 팹(Fab) 디지털트윈 고도화를 위한 장기 파트너십을 8일 발표했다. 이번 협력이 차세대 메모리 공동 개발을 넘어 반도체 설계와 제조 공정의 소프트웨어 표준이 ‘엔비디아 생태계’로 진입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양사 협력의 주요 축은 엔비디아의 3D 시뮬레이션 플랫폼인 ‘옴니버스(Omniverse)’와 ‘OpenUSD’를 활용한 완전 자율 팹 운영 추진이다. SK하이닉스는 ‘자율형 공장(Autonomous Fab) 2030’을 목표로 가상 공간에 실제 팹을 구현하는 디지털트윈 기술 검증을 진행해 왔다.
여기에 엔비디아의 물리 엔진과 자율 이동 로봇(AMR) 제어 플랫폼인 ‘cuOpt’가 결합된다. 생산 라인의 물류 로봇과 공정 설비가 엔비디아의 피지컬 AI(Physical AI) 플랫폼을 통해 제어되는 구조다. 반도체 제조 현장이 대규모 3D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시각화하고 최적화하는 하나의 거대한 AI 인프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러한 팹 운영의 패러다임 전환은 국내 반도체 장비·부품(소부장) 생태계에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SK하이닉스의 팹 전체가 엔비디아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한 가상 환경과 실시간 연동될 경우, 생산라인에 도입되는 검사 장비, 식각·증착 설비, 물류 시스템 역시 해당 디지털트윈 환경과 호환돼야 하기 때문이다.
증권가와 글로벌 산업 연구기관들은 반도체 제조 공정에 디지털트윈을 도입하는 것이 수율 향상 및 원가 절감의 주요 동인이라고 분석한다.
글로벌 IT 컨설팅 기업 캡제미니(Capgemini)의 ‘2026년 기술 비전’ 보고서에 따르면, 디지털트윈을 생산 라인에 적용한 기업들은 운영 효율성 지표에서 평균 15%의 향상을 달성했으며 지속가능성 지표에서도 16%의 개선 효과를 보였다. 기계와 소프트웨어의 통합 제어가 필수적인 과제로 부상하면서 디지털 플랫폼의 중요성이 가중되는 추세다.
시장조사기관 스트래티스틱스 MRC(Stratistics MRC)의 반도체용 디지털트윈 시장 보고서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의 디지털트윈 시장 규모는 올해 21억 8천만 달러(약 2조 9천억 원)에 달하며 향후 연평균 35% 수준의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됐다. 차세대 메모리 공정은 대규모 투자가 수반되고 고도의 미세 공정이 요구되는 만큼 가상 공간에서의 사전 테스트가 팹의 시행착오 비용을 낮춰주기 때문이다.
국내 증권가 역시 엔비디아의 차세대 인프라 확장이 국내 소부장 생태계의 실적 성장과 연결될 것으로 내다본다.
하나증권 리서치센터의 5월 반도체 산업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26년 하반기부터 출하가 본격화되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컴퓨팅 플랫폼 ‘베라 루빈(Vera Rubin)’이 전체 메모리 및 장비 생태계의 수요를 견인할 전망이다. 보고서는 베라 루빈에 탑재되는 베라 CPU가 기존 모델 대비 약 3배 규모인 1천 500기가바이트(GB) 수준의 차세대 메모리를 요구함에 따라, 엔비디아가 글로벌 첨단 메모리 시장의 대규모 수요처로 부상했다고 짚었다.
이러한 맞춤형 차세대 칩 수요 증가는 글로벌 파운드리 기업들의 대규모 자본적 지출(CAPEX) 확대로 이어진다. 하나증권은 대만 TSMC 공급망뿐만 아니라 국내 서플라이 체인에 속한 소부장 업체들에도 낙수효과가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엔비디아가 주도하는 차세대 칩 생산을 뒷받침하기 위해 공정 최적화와 팹 자동화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며, 글로벌 소프트웨어 규격에 부합하는 장비를 제공할 수 있는 기업들의 수주 기회가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엔비디아 플랫폼 등 글로벌 표준 소프트웨어와의 실시간 연동 능력은 현재 반도체 장비 생태계의 기업 가치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 되고 있다. 첨단 제조 혁신의 주도권이 소프트웨어 생태계로 이동함에 따라 국내 소부장 업계 역시 가상 시뮬레이션 환경에 맞춰 장비를 연동시킬 수 있는 소프트웨어 R&D 역량을 확충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