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스위스가 인구 상한선 설정을 두고 국민투표를 앞둔 가운데, 이민 제한이 가져올 산업적 파급효과와 경제 성장 모델 전환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인구 증가와 개방 경제를 기반으로 성장세를 유지해온 스위스 현장에서는 고임금과 인력 수급 압박을 해소하기 위한 공정 자동화 움직임이 구체화되는 양상이다. 통상 전문가들은 이 같은 스위스 산업 구조 변화가 한국 첨단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에 유럽 하이엔드 시장 진출의 새로운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코트라(KOTRA) 취리히무역관에 따르면, 스위스는 오는 14일 인구 1천만 명을 초과하지 않도록 이민 제한 조치를 헌법에 명시하는 안건에 대한 국민투표를 치를 예정이다. 주거난과 교통 혼잡 등 경제 성장에 따른 일상적 부작용이 커지면서 스위스 내 성장 피로감이 정당 성향을 넘어 확산한 결과다.
이번 투표는 단순한 이민 찬반을 넘어 스위스가 성장 중심 경제 모델을 유지할 것인지, 혹은 인프라 부담 완화를 우선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갈림길이 될 전망이다. 결과와 무관하게 현지 산업계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구조 전환 압박을 강하게 받고 있다. 의료기기, 하이엔드 공작기계 등 초정밀 제조 산업 중심의 스위스 경제 구조상, 전문 인력 확보 경쟁과 인건비 상승은 경영의 핵심 과제다. 이에 따라 현지 제조 기업들은 숙련공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고정형 산업용 로봇과 지능형 공정 자동화 투자를 확대하는 추세다.
실제 통계는 한국과 스위스 간 무역 활성화와 국내 소부장의 성장을 명확히 뒷받침한다. 한국무역협회(KITA)의 글로벌 무역통계를 보면, 한국의 대(對)스위스 수출액은 2023년 4억 1천994만 달러에서 2024년 4억 4천670만 달러, 2025년 5억 5천396만 달러로 가파르게 성장했다. 특히 2025년 수출액은 전년 대비 24.0% 급증하며 양적 팽창을 증명했다.
수출 확대를 견인한 핵심 동력은 첨단 부품과 장비다. 국가데이터처 국가통계포털(KOSIS) 통계 자료 분석 결과, 올해 4월 기준 스위스로 향한 한국의 총수출액 1억 8천63만 달러 중 소재·부품·장비 산업 수출액은 1억 4천651만 달러(추정치)에 달했다. 전체 스위스 수출품 중 81.1%가 소부장 품목에 집중된 셈이다. 현지 기업들이 고임금 방어와 구인난 해소를 위해 무인화 설비 도입 속도를 높이면서 기술력을 축적한 한국산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결과로 풀이된다.
수입 데이터를 포함한 거시적 무역 구조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스위스는 전통적으로 초정밀 기계와 바이오·화학 소재의 글로벌 강국으로, 한국 역시 첨단 제조 라인 가동을 위해 스위스산 하이엔드 장비를 대거 수입해 왔다. 전체 산업 무역수지 측면에서는 여전히 수입 규모가 크지만, 소부장 영역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최근 수출액이 수입액을 앞지르는 뚜렷한 흑자 전환 흐름이 관측된다.
이 같은 흑자 역전은 단기적 현상이 아닌 구조적 추세다. 한국의 대스위스 소부장 무역수지는 2025년 6월(7천63만 달러 흑자)을 기점으로 8월, 9월, 11월, 12월에 연달아 흑자를 기록하며 체질 변화의 전조를 보였다.
특히 올해 1월에는 소부장 수출액이 2억 4천345만 달러(추정치)로 치솟으며 단일 월 기준 1억 1천429만 달러의 흑자를 달성했다. 일시적으로 수입이 늘어난 2월을 제외하고 3월과 4월에도 연속 흑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이 스위스의 초정밀 장비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던 과거의 구도에서 벗어나, 지능형 공장 제어 시스템과 로봇·자동화 부품을 역수출하며 ‘상호 보완적 첨단 밸류체인’을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스위스의 인구 상한제 논쟁이 역설적으로 한국 소부장 기업들의 기술 체급과 솔루션 경쟁력을 증명하는 무대가 되고 있다.
통상 환경의 변화 역시 한국 기업에 유리한 기회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번 1천만 명 상한제 발의안의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유럽연합(EU)과의 ‘인력이동 자유협정’ 제한이다. 향후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스위스와 EU 간 외교적 마찰이 불거지고 역내 통관 및 인증 장벽이 강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스위스 제조 기업들은 부품 조달처를 유럽 역외 지역으로 다변화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KOTRA 취리히무역관의 통상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스위스가 속한 유럽자유무역연합(EFTA)과 이미 FTA를 체결해 안정적인 관세 이점을 선점하고 있다. 스위스 기업들이 역내 공급망 리스크 분산을 추진할 때, 고도화된 정밀 제조 인프라를 갖춘 한국이 최적의 전략적 대체 파트너로 부상할 수 있는 구조적 여건이 마련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무역관 측은 국내 소부장 및 지능형 무인화 솔루션 기업들이 스위스 발 자동화 수요와 공급망 다변화 기회를 겨냥해 맞춤형 현지 진출 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취리히무역관은 이번 스위스의 인구 상한 논쟁을 단순한 이민 정책 이슈가 아닌, 향후 현지 산업 구조 변화의 방향성을 가늠할 강력한 신호로 분석했다. 국민투표 결과와 무관하게 노동력 확보와 생산성 유지를 위한 전면적인 산업 체질 개선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무역관 측은 스위스가 향후 노동력과 산업 경쟁력 사이에서 어떤 구조 전환을 선택하는지가 우리 기업의 현지 시장 진출 전략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산업 재편 추이에 따라 자동화, 인공지능(AI), 디지털 헬스케어, 스마트 인프라 분야를 중심으로 새로운 협력 수요가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국내 관련 기업들이 현지 기술 투자 흐름을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