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게임 ‘사이버펑크 2077(Cyberpunk 2077)’나 ‘공각기동대’ 시리즈 등 SF·사이버펑크 장르에는 신체 일부를 기계화하는 의체 기술이 일상적인 기술로 등장한다. 신체를 단순히 개조하는 것을 넘어 기계 장치를 자신의 몸처럼 제어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기술로 보완하고 확장한다.
이러한 기술은 더 이상 특정 장르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현실에서도 뇌와 컴퓨터가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게 하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 BCI)’와 외골격 로봇, 각종 웨어러블과 같은 기술들이 구현되면서 의료적 신체 수복과 능력 확장이 머지 않은 미래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SF·사이버펑크 세계에서는 이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신체 개조가 생필품이자 새로운 스펙이 되면서, 고성능 부품을 이식받는 기득권층과 저가·중고 부품으로 생존하는 하류층 간 양극화라는 비극을 그려낸다. 기득권층은 최신 부품을 기반으로 뇌의 정보 처리 속도를 향상하고 노화와 질병마저 극복한다. 반면 하류층은 조잡한 중고 부품의 결함과 부작용으로 생명까지 위협받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렇게 기술과 대중 사이를 ‘가격’이라는 장벽이 가로막는 문제는 우리 일상에서도 이미 벌어지고 있다.
과거 한국 통신사들은 5G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며 기술혁신을 내세웠다. OTT 플랫폼들은 안방에서 여러 영상 콘텐츠를 편리하게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5G 통신을 이용하기 위해선 기존보다 고가의 요금을 내야 했다. OTT 역시 초기엔 이용자 확보를 위해 1개월 무료와 같은 유입 정책을 폈지만, 대중화 이후에는 점차 가격을 인상해 오고 있다.
빠르게 대중화되고 있는 인공지능(AI) 서비스도 다르지 않다. 챗지피티(ChatGPT), 클로드(Claude), 제미나이(Gemini)와 같은 주요 AI 서비스는 요금제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AI 모델 성능과 횟수를 나누어 제공하고 있다. 가장 높은 요금제는 9월 현재 월 기준 챗지피티 29만 9천 원, 클로드 14만 7천 원(110달러), 제미나이 30만 원에 달한다. 대중적인 유료 요금제도 월 2~3만 원 수준에 형성돼있어 적지 않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AI는 직접적인 이용료뿐만 아니라, 다른 시장에도 가격 장벽을 만들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확대로 GPU와 HBM 등 AI용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메모리 시장 전반의 수급이 빠듯해지고 있다. 이 여파로 PC부품과 플레이스테이션·닌텐도와 같은 게임기 시장에서 가격 상승 압력이 나타나고 있다. 최신 스마트폰과 노트북 등 전자기기 시장 역시 출고가 인상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AI를 직접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 비용의 일부가 전가되고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AI 기본소득’과 같은 논의에 귀가 기울여진다. 세계적인 AI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인프라 확보에 국가의 공공자원이 투입되고 있으며, 그렇게 높아져 가는 AI 생산성으로 만들어지는 막대한 부가 특정 기업이나 자본에 집중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물론 산업의 성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기술 발전의 과실을 사회 구성원들이 적절하게 공유할 수 있는 AI 소득 분배 방안에 대해선 충분한 논쟁이 필요하다.
SF·사이버펑크 장르가 경고하는 디스토피아의 본질은 ‘기술 접근성의 불평등’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기술. 그 기술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부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가 점차 커진다면, 인간을 이롭게 하는 기술은 모두의 삶을 개선하는 대신 새로운 지배계급만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AI는 인간의 생산성과 능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린다. 그렇다면 이제 그 혜택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누리게 하느냐’를 깊게 고민해야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