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연중기획 ‘산업의 뿌리를 묻다’는 창업주의 증언을 통해 한국 제조업의 성장 과정을 기록하는 구술 아카이브다.
이 기획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다. 결정적 선택과 실패, 기술 투자와 인재 철학, 후계자에게 넘기기까지의 고민을 묻는다.
지금 산업의 다음 길을 찾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공을 포장한 미담이 아니라, 버텨낸 사람들이 남긴 구체적인 판단의 기록이다.
1992년 한국 수처리 시장은 치열한 가격 경쟁의 장이었다. 박 대표는 기계 설계와 영업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기술은 가격 경쟁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단기 가격 경쟁 대신 품질과 기술력을 우선하겠다는 경영 철학으로 시장에 뛰어들었고, 수처리 설비 자동여과기(Auto Strainer) 분야에서 30여 년간 신뢰를 쌓아왔다. ‘㈜코리아인바이텍’ 박종호 대표의 이야기다.
박 대표는 1992년 자본금 600만 원과 직원 3명의 개인회사 ‘우경산업’으로 출발해, 1999년 지금의 코리아인바이텍으로 법인을 설립했다. 직장 생활 시절 벨트프레스의 세척수 소모량이 많아 폐수 처리가 부담된다는 현장의 애로사항을 떠올려, 세척수를 다시 쓸 수 있게 하는 자동여과기를 개발해 벨트프레스를 사용하는 폐수 처리장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그는 “퇴직한 후 대리점을 열었지만 장사꾼으로만 남기는 싫었다”라며 “엔지니어로서 내 명판을 붙인 기계를 제조해 자신 있게 팔고 싶었다”라고 회상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한국 경제를 덮쳤다. 대부분 외산으로 설계된 국내 하수처리장이나 플랜트의 설비 가격이 치솟으면서, 코리아인바이텍은 오히려 가격 경쟁력을 갖춘 국산 대체재로 자리 잡을 기회를 얻게 됐다.
박종호 대표는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로 ‘롤(Roll) 냉각수 여과용 자동여과기’를 공급한 포스코 포항제철소 3연주 합리화 사업을 꼽았다. 철판을 얇게 압연하는 롤은 뜨거운 열과 마찰로 계속 가열되기 때문에 고압으로 물을 분사해 식혀야 한다. 이 냉각수를 재순환시키는 과정에서 철 스케일 등 이물질을 걸러내는 장치가 냉각수 여과용 자동여과기다.
코리아인바이텍의 장비는 현장에서 기존의 프랑스 제품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포항제철소뿐만 아니라 광양제철소에도 공급이 이어졌다. 이후 20여 년간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현재까지 200여 대 이상의 자동여과기를 납품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포스코 납품 실적이 없다는 점 때문에 초기에는 관계자들의 의구심이 상당했다. 박 대표는 “안되면 내 집을 팔아서라도 설비를 원위치시키겠다”라며 배수의 진을 치고 설득했고, 결국 성능을 인정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해외 제품이 주도하던 현장에서 인정받은 경험을 통해, 이제 우리 기술로 시장에서 승부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라며 “좋은 기술은 반드시 시장에서 평가받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후 회사의 방향도 단순 제작이 아니라 현장 맞춤형 설계·품질 개선·장기 신뢰 확보로 분명해졌다”라고 말했다.
제조업의 위기를 넘기는 힘은 ‘신뢰’에서 나온다
코리아인바이텍의 핵심 경쟁력은 ‘현장 맞춤 설계’에 있다. 해외 설비는 규격화된 기성품을 구매해 현장의 환경을 맞춰야 하지만, 코리아인바이텍은 설계 단계부터 배관 위치나 설치 공간 등 현장의 물리적인 조건을 반영해 가장 최적화된 제품을 제작한다. 이 때문에 수직형, 수평형, 분해조립 간편형 등 다양한 모델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높은 내구성을 자랑한다. 산업용 설비의 수명은 보통 10년 안팎으로 여겨지지만, 코리아인바이텍의 제품들은 현장에서 20년 이상 안정적으로 가동 중이다.
박종호 대표는 “수처리 설비는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운전할 수 있어야 한다”라며 “여과 성능뿐 아니라 내구성, 압력 손실, 유지보수의 편의성까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박 대표는 ‘자동여과기’ 한 우물만 고집해 온 것을 경영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택이었다고 강조했다. “자동여과기 한 분야에 집중해, 세계에서 인정받는 독보적인 제품을 만들고자 했다”라며 “수십 년간 집요하게 파고들어 약 30개의 특허를 보유하게 됐으며, 코리아인바이텍만의 단단한 기술 자산이 됐다”라고 언급했다.
그는 평소 직원들에게 ‘제품이 영업을 하게 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한번 장비를 사용해 본 고객이 품질을 인정하고 다시 찾게 만드는 것, 그것이 코리아인바이텍과 박종호 대표가 롱런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렇기에 박 대표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고객 신뢰가 걸린 현장 문제’라고 표현한 그는, “절대 피하지 않고 직접 달려가 원인을 확인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방식으로 해결해 왔다”라며 “결국 제조업은 말보다는 결과이며, 위기를 돌파하는 힘도 신뢰에서 나온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신뢰는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
“정직은 최고의 기술이다”
박종호 대표가 평생 경영자로 살아오며 지켜온 좌우명이다. 그는 “정직하게 만들고, 정직하게 설명하고, 정직하게 책임지는 기업은 결국 고객이 다시 찾아온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라고 전했다.
그래서 코리아인바이텍도 규모가 큰 회사보다는 ‘고객이 가장 신뢰하는 회사’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코리아인바이텍 제품이라면서 믿고 사용할 수 있다”라는 시장의 평가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는 것이다.
박 대표는 “품질에서 타협하지 않고, 고객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책임지는 것이 창업 이후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원칙”이라며 “신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지만,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라고 밝혔다.
사람을 뽑을 때도 이러한 원칙이 적용된다. 그는 “제조업은 설계·제작·검사·납품·사후관리까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라며 “그렇기에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지고, 동료와 고객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태도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라고 짚었다. 아울러 “부족한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장에서 가르칠 수 있지만 성실함과 책임감을 갖춘 인품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박종호 대표는 리더십의 본질에도 ‘정직’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말과 행동이 달라선 안 되며, 직원들에게 신뢰를 요구하면서 정작 리더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조직은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절대 해선 안 되는 행동”이라고 지적하며 “성과는 직원에게 돌리고 책임은 자신이 짊어지는 것이 좋은 리더다”라고 단언했다.
창업주 인터뷰에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은 승계였다. 그는 향후 후계 구도에 대해 “아직 특별한 계획은 없다”라면서도 “정직과 철학이 맞는 사람”을 후보 기준으로 제시했다.
눈앞의 이익보다 실력과 신뢰를 먼저 쌓아라
박 대표는 ‘현장이 최고의 교과서’라는 생각으로 고객과 직접 대화하며 현장의 문제를 파악한다. 또한 전시회·기술자료·협회 활동 등을 통해 기술 트렌드를 꾸준히 살피고 있다.
최근 그의 화두는 AI(인공지능)와 3D 설계 도입이다. 박종호 대표는 “3D 설계나 공정 자동화 기술을 일찍 도입했더라면 성장 속도가 더 빨랐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변화에 대한 거부감과 승인 규격의 부재 등 중소 제조업이 안고 있는 현실적 제약을 지적했다.
현재 한국 제조업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는 ‘숙련 기술자의 고령화와 젊은 인재 부족’을 지목했다. “제조업은 현장에서 오랜 경험으로 축적되는 기술이 많은데, 이 기술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으면 산업 경쟁력이 약해질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그는 해결책으로 “기업은 기술을 체계적으로 표준화하고 교육해야 하며, 정부는 제조업이 미래 산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기술 인력 양성에 정책적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라고 제언했다.
박종호 대표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한국 산업계와 젊은 기술인들에게 “대한민국 제조업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경제의 뿌리로, 좋은 기술과 성실한 사람들이 있는 한 제조업의 미래는 밝다”라며 “‘기술은 경쟁력이지만 신뢰는 기업의 생명’이라는 신념을 잃지 않고, 작은 기술 하나라도 더 발전시키고 후배들에게 경험을 나누며 우리 산업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밝혔다.
이어 “좋은 기술은 시간이 지나도 인정받고, 신뢰는 가장 큰 자산이 되기에 눈앞의 단기적인 이익을 좇기보다 기술·신뢰를 먼저 쌓길 당부한다”라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배우며 현장을 소중히 여기는 경영자가 되길 바란다”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