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대한민국이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 시장과 기술의 판을 짜는 ‘설계형 국가(Design Nation)’로 전환해야 한다는 산·학·연 리더들의 제언이 쏟아졌다. 이를 위해 민·관이 역할을 분담하는 ‘원팀’ 체제를 구축하고, 실패를 용인하며 도전적 질문을 던지는 혁신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18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국가전략기술 서밋(SUMMIT) 2025’ 릴레이 발표 세션에서는 유홍림 서울대 총장, 정수헌 LG사이언스파크 대표, 박상진 한국산업은행 회장, 김성근 포스텍 총장이 연단에 올라 대한민국 차세대(NEXT) 전략기술 확보를 위한 해법을 제시했다.
유홍림 총장 “MIT 베끼기 그만… 우리만의 ‘질문’ 던져야”
첫 발표자로 나선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선진국의 기술과 표준을 빠르게 학습하던 추격형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단언했다. 그는 “이제 우리는 AI, 반도체 등 핵심 분야의 글로벌 최전선에 서 있다”며 “남이 만든 지도를 해석하는 나라에서, 지도를 직접 설계하는 ‘디자인 네이션’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총장은 그 방법론으로 ‘질문 기반 혁신(Question-Driven Innovation)’을 제시했다. 그는 “MIT나 실리콘밸리의 트렌드를 좇는 대신 저출산, 에너지 위기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거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며 “서울대가 학계, 산업계, 정부와 함께 그 질문을 발굴하는 플랫폼이 되겠다”고 밝혔다.
정수헌 대표 “글로벌 기술패권 전쟁, ‘민·관 원팀’ 아니면 못 이겨”
산업계를 대표한 정수헌 LG사이언스파크 대표는 구체적인 민·관 협업 모델을 제안했다. 정 대표는 “미국의 거대 자본과 중국의 국가 주도 투자 사이에서 한국이 생존하려면 통합된 기술 개발 체계가 필수”라고 진단했다.
이를 위해 정 대표는 3대 과제를 제시했다. 정부가 GPU·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하고 기업이 특화 모델을 개발하는 역할 분담, 딥테크 분야 공동 투자 및 테스트베드 구축, 산·학·연 연계 맞춤형 인재 양성 등이다.. 그는 “LG화학이 KIST의 기술을 이전받아 상용화하는 CCU(탄소포집활용) 프로젝트처럼, 통합설계와 공동투자가 일어나는 ‘한국형 R&D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상진 회장 “돈맥경화 뚫는다… 벤처 ‘데스 밸리’ 극복 지원”
기술 패권 경쟁을 뒷받침할 금융 지원 방안도 제시됐다. 박상진 한국산업은행 회장은 “부동산 등에 쏠린 자금을 생산적인 전략산업으로 유도하는 금융 대전환을 추진 중”이라며 최근 출범한 ‘국민성장 펀드(가칭)’를 소개했다.
박 회장은 “기술 기업들이 연구 단계의 시행착오와 자금 부족으로 무너지는 ‘데스 밸리(죽음의 계곡)’를 넘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책금융의 역할”이라며 “창업부터 유니콘 도약까지 전 주기를 지원하고, ‘넥스트라운드’ 등을 통해 기술과 자본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김성근 총장 “한국은 하이테크 우등생… 이젠 ‘딥테크’로 판 바꿔야”
마지막 주자로 나선 김성근 포스텍 총장은 기술의 성격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은 전 과목에서 우수한 ‘하이테크’ 모범생이지만, 미래 게임체인저가 될 ‘딥테크’ 역량은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김 총장은 “정부는 12대 전략기술 중 하이테크와 딥테크를 구분해 접근해야 한다”며 “딥테크 육성을 위해 IPO(기업공개)보다 M&A(인수합병)가 활성화되는 생태계가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이어 정부 역할에 대해서는 “지나친 개입도, 방관도 하지 않는 ‘골디락스(Goldilocks·최적의 균형)’가 필요하다”며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적 토양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