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자산이나 매출 규모가 커질수록 규제가 누적되는 ‘성장 페널티’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는 주요 선진국 중 유일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기업 규모를 이유로 한 사전 규제를, 위법 행위에 따라 제재하는 ‘사후 규제’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4일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주요국의 기업규모별 규제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기업의 자산총액, 매출액, 종업원 수 등 정량적 기준에 따라 규제가 누적되는 구조다.
김영주 부산대 교수팀은 상법·공정거래법 등 12개 주요 경제 법률에서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의무가 가중되는 ‘계단식 규제’가 343개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국내 기업은 자산 5천억 원, 2조 원, 5조 원, GDP의 0.5%(약 11조6천억 원) 등 일정 구간을 넘을 때마다 새로운 규제가 부과된다. 보고서는 이를 “기업 성장을 저해하는 구조적 페널티”라고 지적했다.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기업 규모를 기준으로 한 징벌적 규제를 두고 있지 않다.
미국과 영국은 기업 규모보다 법적 지위와 행위를 규제 기준으로 본다. 미국은 대기업에 대한 연방 차원의 별도 규제가 없고, 독점 여부도 시장 경쟁 제한 등 행위 중심으로 판단한다. 영국은 상장 여부에 따라 공시와 지배구조 의무가 달라질 뿐, 규모에 따른 차등 규제는 없다.
독일과 일본 역시 법률상 대기업을 구분하긴 하지만 회계 처리 또는 행정 편의를 위한 기술적 구분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과거 고도성장기에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려고 도입된 규제 방식이 현재의 저성장·글로벌 경쟁 환경에서는 오히려 기업의 동력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했다.
이종명 대한상의 산업혁신본부장은 “GDP 대비 수출 비중이 44%에 달하는 상황에서 규모별 규제가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라며 “지금 같은 성장 정체기에는 성장 유인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문태 대한상의 산업정책팀장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현행 사전 규제는 기업 활동을 본질적으로 제한하는 구조”라며 “이런 구조에서는 기업이 규제를 감수하며 성장할 유인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 규모와 무관하게 독과점이나 불공정 거래 등 실제 위법 행위에 대해서만 강하게 제재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라며 “사전 일괄 규제 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규제 완화가 ‘재벌 특혜’나 ‘공정거래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그는 “논의를 통해 단계적으로 보완할 수 있다”며 “핵심은 기업 성장에 따라 불이익이 누적되는 구조를 끊는 것”이라고 했다.
대한상의는 기업성장포럼을 통해 법적 지위와 행위 중심 규제 체계로 전환하는 내용을 담은 법 개정안을 조만간 제안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