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일보]
규제는 흔히 신기술 도입의 장애물로 지목되지만, 안전과 계통 안정이 최우선인 전력산업에서는 혁신을 위해 무작정 완화할 수만은 없다. 이렇게 안전과 혁신 사이의 세밀한 조정이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한국 전력산업의 실증 인허가 기준을 기업 개별이 아니라 ‘공공 실증 공간’ 단위로 옮기자는 제언이 나왔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김동영 팀장은 국회 의원회관 2세미나실에서 21일 개최한 ‘중소벤처스타트업 혁신성장을 위한 에너지생태계 규제개선 활성화 국회 정책 토론회’에서 에너지 신기술 실증 테스트베드로 ‘에너지 신기술 실증존(이하 실증존)’을 내놨다.
김 팀장은 “일반 중소기업이 신기술을 사업화하는 16.9개월이 걸리지만, 에너지 신제품의 사업화에는 33.1개월로 두 배가 넘게 소요된다”라며 “기술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실증할 수 있는 기회가 없고, 필요한 단계가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대기업은 자체 설비를 짓거나 해외에서 실증하는 방식으로, 자본을 통해 실증 환경을 스스로 확보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두 방법 모두 불가능”하다며 “자체 설비를 짓더라도 실증 승인을 기다리는 데 2년 이상 걸린다면 어떤 기업도 버티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그는 “개별 사업, 개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공백 때문”이라고 짚으면서도, “그러나 전력산업의 규제 전체를 네거티브로 바꾸자는 것에도 반대한다”라고 밝혔다.
설명에 따르면, 전력산업은 ‘외부성’이 상당하다. 실증의 이익은 특정 기업이 독점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고의 비용은 전력 계통에 연결된 모든 주체가 나눠 가지게 된다. 사고가 나면 원인을 특정하기도 어려워 책임을 묻기 힘들다. 즉, 사후 책임이 없어서 사전 규제를 완전히 걷어내면 ‘공백’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김동영 팀장은 실증존을 ‘울타리’ 방식으로 구성하자고 제시했다. 실증 범위·실증 필요 기간·실증 기업·기술 검증 4가지 요소로 외부성을 방지하는 것이다.
제도를 집행하는 공무원의 유인구조도 설계해야 한다고 짚었다. 그는 “현재 승인 후 발생하는 사고의 책임은 담당자 혼자 떠안지만, 결정을 미뤘을 때의 비용은 기업과 사회가 분담한다”라며 “법이 아무리 네거티브로 바뀌어도 현장에서는 포지티브로 운영되는 이유”라고 했다. 해소 방안으로는 무엇을 유예할 수 있는지, 판단을 미룰 수 있는 기간과 결정 시한은 언제까지인지 명문화해야 한다고 했다. 면책 조항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김 팀장은 현재 한국 실증 지원 제도인 규제샌드박스와 규제자유특구를 거친 실제 중소기업의 사례를 들었다. 두 사례에서 실증 승인을 위한 검사는 똑같이 2개월이 소요됐지만, 검사할 기준을 만드는 데 규제샌드박스는 4개월, 규제자유특구에서는 10개월이 걸렸다.
이를 두고 “안전 기준이 없다 보니 신기술 실증이 접수될 때마다 새로운 기준을 만드느라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있다”라고 분석한 그는 “특히 해당 기업들은 5개의 기관을 거쳤는데, 기관은 자기 기한을 지켰으나 기관과 기관 사이 대기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더디게 처리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직렬’로 이어 붙인 제도 구조 자체의 문제”라고 해석했다.
김동영 팀장은 화재·폭발·감전·계통 붕괴와 같은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의 규제가 유예의 범위에 들어가선 안 된다고 단언했다. 문제는 ‘심사의 단위’가 ‘기업’에 있다고 봤다. 실증 특례를 신청하는 기업마다 기준을 마련하고 안전을 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실증존을 지정하면 소방청이나 전기안전공사 등 관련 주체가 해당 구역의 안전 요건을 심사하고, 이후 입주 기업은 개별 기기만 검사받는 ‘병렬’구조를 제안했다. 또 위험도에 따라 저위험은 네거티브, 중위험은 보호장치·운영제한의 조건부, 고위험은 완전 격리로 차등 관리하는 안전 설계 방식도 덧붙였다.
김동영 팀장은 “기업들은 ‘규제를 없애달라’는 것이 아니라 ‘실증할 장소와 기다리지 않는 절차’를 요구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바나듐이온배터리 사업화를 진행하고 있는 스탠다드에너지 김부기 대표는 현장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김동영 팀장의 제안에 공감했다.
그는 규제 샌드박스 승인 절차를 진행했던 경험을 소개하며 “실증 설비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상업용 설비와 동일한 수준을 요구받아, 인허가에 상당한 시간과 자원이 소모됐다”라며 “김동영 팀장이 제안한 실증존이 활성화된다면 당시 겪었던 시간이 훨씬 단축돼 실증 진입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국내 실증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한국전력공사나 코트라(KOTRA) 등 정부 부처가 함께 현지 실증 및 인허가 절차를 지원해 준다면 해외 진출 사례도 더 빠르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초기 시장 확보와 제도적 한계에 대해서도 짚었다. 김 대표는 “차세대 ESS의 초기 시장 확보에는 공공기관의 수요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공공기관 구매나 장기 운영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라며 “특히 한국의 전기요금 체계에서는 ESS 도입을 통한 수익 창출에 한계가 있어, ESS 산업 활성화를 위한 요금 체계 보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