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의 뿌리는 거창한 구호보다 한 분야를 오래 지킨 현장에 가깝다. 자본과 인프라가 부족했던 시절 창업에 나선 경영인들은 기계를 만들고 사람을 키우며 없던 시장을 열었다.
산업일보 연중기획 ‘산업의 뿌리를 묻다’는 이들이 회사를 일으키고 위기를 견딘 과정에서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기록한다.
이번 편의 주인공은 1991년 설립 이후 산업용 부품 세척기와 세정시스템을 개발·제조해 온 클레슨의 양희준 대표다.
양 대표는 전 직장에서 쌓은 식기세척기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하자”는 각오로 1991년 산업용 세척기 회사를 세웠다. 창업 당시 사명은 동양초음파였다. 회사는 초음파 기술을 적용한 소형 부품 세척기부터 만들었다.
그는 “당시 경영 성과와 사회공헌 활동을 높이 평가했던 동양정밀에서 ‘동양’이라는 이름을 따왔다”라고 설명했다.
1990년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수출 호황을 누리면서 부품공장의 가동률이 늘었고 세척설비의 필요성도 덩달아 커졌다. 2~3명의 직원에 불과하던 동양초음파도 인원을 점차 늘리면서 대형 부품 세척기 분야까지 사업 범위를 넓혔다.
양 대표는 당시 사업을 해외시장으로 확장하지 못하고 국내에 머문 점이 가장 아쉽다고 돌아봤다.
그는 ‘기술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창업했지만, 초기에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말했다. 제품 제작뿐 아니라 자금과 인사, 세무 관리도 경영의 중요한 축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배웠다는 것이다.
회사는 2008년 무렵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사내 공모를 거쳐 사명을 ‘클레슨’으로 바꿨다. 깨끗함을 뜻하는 ‘Clean’과 초음파 ‘Ultrasonic’을 조합한 이름이다.
수계세척기로 맞은 성장의 전환점
부품 세척기로 기반을 다진 클레슨은 2012년 전환기를 맞이했다. 현장 영업을 직접 맡았던 양희준 대표는 대기업들이 물류용 팔레트 재활용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팔레트 세척기를 개발했다.
양 대표에 따르면 당시 60인치 이상의 대형 TV 생산이 늘면서 하부 섀시(Bottom Chassis)와 후면 커버(Back Cover)를 세척하는 수계세척기 제작 문의가 들어왔다. 부품을 프레스로 찍어내면서 묻어나는 기름과 쇳가루 등 이물질을 제거해야 했는데, 글로벌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기존 유기 용제 대신 물로 씻어내는 수계세척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클레슨은 팔레트 세척기에 적용했던 기술을 바탕으로 설계를 조정해 대형 TV 부품용 장비를 개발했다. 워터젯 방식과 자체 개발한 AIR KNIFE를 금형으로 표준화하여 건조 공정에 적용했으며 세척 시간도 기존 15~30초에서 6초 수준으로 줄였다는 설명이다. 이 수계세척기가 시장에 알려지면서 관련 수주도 빠르게 늘었다.
그는 “당시 대형 공장 증축으로 은행 부채가 늘었지만, 수계세척기 매출이 증가하면서 몇 년 안에 부채의 절반가량을 갚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우려에도 시설과 대형 장비 개발에 투자한 것이 이후 대기업 실사와 수주 과정에서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양 대표는 “임직원들이 2~3년간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납기에 시달리며 바쁘게 생산과 영업 활동을 했다”라며 “생산과 신규 연구개발을 병행했기에 변화하는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라고 회고하며 당시 임직원들의 노고가 컸음에 감사한 마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전했다.
회사 측에 따르면 클레슨은 매년 매출액의 5% 이상을 R&D에 투입하고 있다. 그는 생산과 연구개발을 병행한 경험이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는 힘이 됐다고 말했다. 당장의 비용 부담보다 축적된 기술이 새로운 수주로 이어질 가능성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은 시간
성장세가 이어지던 클레슨은 2016년 큰 위기를 맞았다. 양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고객관리·영업 담당 본부장이 경쟁사로 이직하면서 도면·견적서·원가내역과 같은 기밀자료는 물론, 30여 년 동안 축적된 거래처 정보를 가져간 뒤 납품단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영업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클레슨의 납품단가를 낮추다 보니 매출도 함께 떨어지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양희준 대표는 “‘회사 망하기 일보 직전이구나’하는 심정이었지만, 응원과 격려의 전화를 걸어온 기존 거래처들의 의리와 신뢰 덕분에 버텨낼 수 있었다”라고 전했다. 다행히 2017년 무렵 전기차(EV) 전지용 세정장비를 개발하면서 배터리 분야로 사업을 넓혔다. 현재는 ESS 분야와 수소 연료전지 셀 세정기도 개발 완료해 수주로 이어진다고 언급했다.
직원들을 비교해선 안 된다
양 대표는 리더가 경계해야 할 행동으로 “남과 비교하는 것”을 꼽았다. 누구에게나 강점과 약점이 있는 만큼, 직원의 장점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배치·활용하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할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관리자의 역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뽑을 때는 ‘삶의 영감을 준 책이나 인물’을 묻는다. 답변을 통해 지원자의 관심과 가치관을 살피고 어떤 업무와 동료가 잘 맞을지 가늠하기 위해서다.
현재 양희준 대표는 자녀인 양현정 실장(경영지원·회계)과 양정혁 차장(기술영업)을 후계자로 준비시키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사원으로 입사해 부서장까지 성장했다. 그는 후계자에게 바라는 역량으로 ‘사람 관리’를 강조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리더는 없기에 주변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라며 “직원의 부족한 면보다는 장점을 찾아내는 안목을 키웠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다만 양 대표는 자녀의 역량을 넘어 제조업을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에 더 안타까워했다. 제조업을 낡은 산업처럼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과 중소 제조기업이 체감하는 규제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35년 세척기 전문 기업, 다음 성장동력을 고민하다
양현정 실장은 부친을 두고 일상에서도 늘 사업을 고민하는 전방위형 경영인이라고 표현했다. 음식, 여행 등 일상적인 소재로 대화가 시작되나 끝은 결국 클레슨의 사업과 연관 짓는 대화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세정기와 무관한 분야에서 장비 제작 문의가 오더라도 호기심에 직접 현장을 찾아보고, 저녁 식탁에서 가족들과 사업성을 논의하는 게 일상이다.
그는 부친과 함께 세척기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회사가 다음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양 차장은 다양한 산업의 요구에 맞춰 세척기를 설계·제작하는 점을 회사의 강점으로 꼽았다. 앞으로는 이 가운데 어떤 기술에 집중하고 변화하는 고객 수요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목하고 있는 과제는 인공지능 활용과 인력난 대응이다. 양 차장은 젊은 기술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업무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클레슨은 AI를 활용해 반복적이고 복잡한 업무의 처리 시간을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양 차장은 청년 직원들이 또래 동료가 있는 근무 환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중소기업은 신입사원을 한꺼번에 많이 채용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클레슨은 기존 직원의 교육·지도 역량을 높이고 사내 교류를 확대해 신입사원의 적응을 돕는 방안을 찾고 있다.
양희준 대표는 경영자로 살아오면서 평생 지켜온 좌우명으로 ‘긍정적 마음가짐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자’를 제시했다. 실패도 경험으로 받아들이며 한 분야를 꾸준히 파고들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는 뜻이다. 양 대표는 자녀들과 의견이 다를 때도 가능한 한 직접 판단하고 결과를 경험하도록 맡긴다고 말했다. 작은 실패가 스스로 얻는 배움으로 남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양 대표는 젊은 기술인들에게 자신이 잘하고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먼저 찾으라고 조언했다. 낯선 분야의 경험도 언젠가 어려움을 넘는 지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설렁탕집을 꿈꾸다 다시 기계 앞에 선 서른 살의 선택도 그렇게 클레슨의 35년으로 이어졌다.